양식은 건드리지 마 — 관공서 신청서를 빈 칸만 채우게 시킨 46분
제안서 평가위원 신청서가 왔다. 비슷하게 새로 만들면 반려되는 문서다. AI에게 원본 .hwp의 빈 칸만 채우고 도장까지 찍게 시켰더니, 원본과 쪽수·픽셀이 같은 파일이 나왔다. 사람이 한 일은 세 가지뿐이었다.
제안서 평가위원 후보자 등록 요청이 왔다. 관공서 양식이 늘 그렇듯, 비슷하게 새로 만들면 반려되는 문서다. 표 한 칸, 글꼴 하나 건드리면 안 된다.
그래서 "채워줘"가 아니라 "양식을 변경하지 말고 채워줘"라고 시켰다. 12시 30분에 시켜서 1시 42분에 받았다. 그중 AI가 실제로 일한 시간은 45분 51초.
결과물은 원본과 쪽수가 같고, 손대지 않은 페이지는 픽셀 단위로 동일한 .hwp 파일이었다. 도장까지 찍혀서.
지시는 한 문단이었다

심사위원 후보자 등록요청이 왔어.
/kdr로 작성해줘. 안내문을 읽고 양식을 변경하지 말고 작성해줘.D:\...\이력서여기에 기존에 다른 데 지원한 내 이력들이니 참고해서 적당히 작성해줘.
이게 전부다. 돌이켜보면 이 한 문단에 세 가지가 들어 있었다.
- 무엇을 — 신청서 작성
- 지켜야 할 제약 — 양식 변경 금지
- 근거 자료가 어디 있는지 — 이력서 폴더
세 번째가 제일 중요했다. AI는 내 학력도 경력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여기저기 지원하며 쌓인 신청서들이 한 폴더에 모여 있었고, 그걸 읽고 알아서 채웠다. 자료를 한곳에 모아두는 게 자동화의 8할이라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첨부파일을 하나씩 올릴 필요도 없었다. 메일로 받은 안내문과 양식을 폴더에 넣고, 그 폴더에서 실행했을 뿐이다.
사람이 한 일은 세 가지
작업이 한창 돌아가던 중에 내가 끼어들었다. 도장 이미지를 그대로 대화창에 던져 넣었다.

여기 도장도 있어. 정확한 위치에 넣어서. 완료해줘.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시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게 자동화가 아니라 반자동화인 이유다. 진행 중에 재료를 더 얹으면 된다.
결국 사람이 한 일을 세어 보면 이렇다.
- 지시 한 문단
- 도장 이미지 한 장
- 결과 확인
AI가 혼자 겪은 시행착오
내가 보고 있지 않은 46분 동안, 막힐 때마다 스스로 방법을 바꿨다.

한글(HWP) 파일을 프로그램으로 다뤄 본 사람이라면 알 만한 함정들이 그대로 나왔다. 기록해 둔다.
1. 텍스트가 안 바뀐다. find_replace()는 찾기만 하고 치환은 하지 않는다. True를 돌려주는데도 본문은 그대로다. find_replace_all()만 실제로 바꾼다. 대신 이쪽은 성공해도 False를 돌려주기 때문에, 반환값을 믿지 말고 다시 찾아서 사라졌는지로 검증해야 한다.
2. 도장이 글줄 아래로 처진다. 문단 기준(Para)으로 음수 세로 오프셋을 주면 조용히 0으로 잘린다. 도장이 이름 옆이 아니라 아래로 흘러내린다. 쪽 기준(Paper)으로 바꾸고 좌상단부터의 절대 좌표를 주니 정확히 앉았다.
3. 표 안에 도장을 넣으면 쪽이 밀린다. 표 셀 안 문단에 붙인 띄움 개체는 셀 높이를 키운다. 게다가 삽입 직후 기본값이 '자리 차지'라, 그것만으로 한 줄을 먹는다. '글 앞으로'를 먼저 한 번 적용한 뒤 좌표를 넣어야 한다.
4. 이메일이 파란 밑줄이 된다. 셀을 빠져나가는 순간 자동 하이퍼링크가 걸린다. 입력 직후에 서식을 고쳐 봐야 소용없고, 모든 편집이 끝난 맨 마지막에 다시 걸어야 한다.
그리고 이 양식은 빈 칸인 상태로 이미 1쪽이 꽉 차 있었다. 한 줄만 늘어도 페이지가 터진다. 그래서 입력 글자를 11pt로 줄이고, 좁은 칸 하나는 10pt로 더 줄였다. 이건 AI가 실측해서 판단한 부분이다.
"됐습니다"는 증거가 아니다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보고 방식이었다.
- 총 9쪽 = 원본과 동일 (쪽이 안 늘어남)
- 4~9쪽 픽셀 비교 diff = 0 — 재단 내부용 서식은 손대지 않았다는 증거
- 글자를 왜 11pt로 줄였는지, 근무처 칸은 왜 10pt인지까지 설명
그리고 물어본 것들. 직장 전화번호를 비워 뒀는데 채울지, 제출할 때 1~3쪽만 뽑을지. 자기가 판단하기 애매한 건 남겨 두고 물었다.
"다 됐습니다"는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원본과 쪽수·픽셀을 비교하게 시키면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볼 필요가 없어진다. 이 습관 하나가 검토 시간을 통째로 없앤다.
Before / After
받은 원본은 이랬다.

나온 결과는 이렇다.

빈 칸만 채워졌고 표·글꼴·쪽수는 원본 그대로다. 도장은 이름 끝 글자에 겹쳐 찍혔다. (개인정보는 캡쳐에서 가렸다.)
남는 것
이번 건에서 건진 건 신청서 한 장이 아니라 세 문장이다.
하나. 만들지 말고 채워라. 관공서 양식은 비슷하게 새로 만들면 반려된다. "양식을 변경하지 마"라는 제약 한 줄이 결과물의 성패를 갈랐다.
둘. 내 자료가 어디 있는지 가리켜라. AI는 내 이력을 모른다. 폴더 위치만 알려주면 알아서 읽는다. 그러려면 평소에 자료가 한곳에 모여 있어야 한다.
셋. 검증까지 시켜라. 결과가 맞는지 사람이 다시 보는 순간, 자동화로 아낀 시간이 되돌아온다.
작업 화면 캡쳐 열 장을 그대로 던지고 "수강생용으로 정리해서 캔버스에 올려줘"라고 했더니 단계별 페이지가 하나 나왔다. 창원내일의 학교 수강생들에게 보여줄 10단계 캔버스에 정리해 뒀다. 결과물이 다시 재료가 되는 것, 요즘 일이 이렇게 굴러간다.